75. 아르헨티나

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75. 아르헨티나

Global Capitalism

by Paradise Guy 2024. 7. 27. 09:07

본문

728x90
반응형
SMALL

1980년대 말 그들은 GMO곡물을 최초로 실험할 대상으로서 아르헨티나가 선정된다.

GMO지지자들은 이를 제2의 녹색혁명이라 부르고 열렬히 환영했으며 

이 외 여러 개발도상국에서도 수확량을 늘려준다는 빌미로 널리 광고되었다.

이에 따라 아르헨티나는 GMO작물을 경작하는 농경지 규모가 미국 다음으로 넓은 나라가 된다.

특히나 아르헨티나에서 시행된 콩 혁명은 어떻게 한 국가가 식량자급력을 잃어가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생활수준이 넉넉했다.

포퓰리즘 정책을 열심히 추진했던 후안 페론 시대의 결실이기도 했는데

그의 치세 초기에 아르헨티나는 잘 조직된 강력한 노동조합과 

경제에 치중하는 중앙정부를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아르헨티나는 북유럽 국가들의 사회민주주의 모델과 유사한 특징을 띠었는데

1976년 미국 정부가 밀어준 군사쿠데타와 정권교체로 인해 막을 내린다.

이 군사 쿠데타는 아르헨티나에서 늘어만 가는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적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되었는데 실상은 날조된 것이다.

또한 쿠데타를 일으킨 아르헨티나의 군부 지도자들은 

대부분 미육군남미학교에서 미국방부로부터 훈련받은 인물들이었다.

 

이 당시 아르헨티나의 농업은 가족농이 주도했으며 이들의 농업제도는 생산성이 상당히 좋았다.

아르헨티나에서 나는 기름진 토양과 농경문화 덕에 농산물이 국내수요를 모두 감당하고도 남았다.

정부의 농업 보조금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농민들의 빚도 극히 적었다.

 

1980년대 아르헨티나에 닥친 부채위기와 함께 이 모든 것이 달라졌다.

1970년대에 석유가격이 급상승하자 세계적인 은행들이 아르헨티나에 차관을 제공하였고

이로 인해 달러빚이 급격하게 불어났다

1979년 10월 달러의 붕괴를 막기 위해 미국 연방준비은행에서 갑자기 차관금리를 300% 정도 인상한다.

이러한 조치는 아르헨티나 외채에 큰 영향을 끼쳤고 1982년에는 급기야 부채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1989년 10여 년 동안 폭압적인 군사정권에 시달려온 아르헨티나는 

국가주권을 침해 당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메넴 대통령이 취임하는데 그는 HW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친밀한 사적관계를 포함하여 

북미에 최상의 연줄을 두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뉴욕의 은행가들은 아르헨티나 정부의 핵심요직이 경제장관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이 자리에 도밍고 카바요라는 사람을 앉히게 된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내셔널뱅크의 은행장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뉴욕 금융가에서는 이름이 상당히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이에 따라 메넴정부의 경제정책 또한 워싱턴과 뉴욕에서 결정하게 되었다.

이 정책은 과감한 경제개방과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에

그동안 규제를 통해 보호받아온 시장이 취약해지고 

결국에 아르헨티나를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만든다.

심지어 이 초인플레이션은 더욱더 아르헨티나 경제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는데

국영 텔레컴 회사, 국영 석유 독점기업 심지어 사회보장 국가연금까지 민영화되었다

이에 따라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되었으며 메님의 측근과 패거리들 세력은 

국민들의 세금으로 억만장자가 되었다.

 

1991년 아르헨티나는 IMF에게 통화통제권을 넘겨주며 인플레이션은 끝이 난다.

아르헨티나 화폐의 가치를 달러화 대비 1:1 수준으로 고정시키는데

환율이 고정된 페소화는 1990년대에 외국 투자자들이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투자하며

막대한 이득을 거둬들일 수 있게 된다.

 

1995년 몬산토는 라운드업레디 콩을 세상에 내놓는데

이 콩은 라운드업이라는 제초제를 무차별 살포해도 살아 남을수 있는 내성을 지녔다.

다른 작물들도 바람에 의한 오염으로 어쩔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는 몬산토 작물이 더욱더 확산하게 되는 도움을 주게 된다.

또한 라운드업 제초제를 써서 경작하는 농지는 재래의 노동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됐다.

농지를 드넓게 확장한 후 농기계를 사용하여 생산성을 극대화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거대한 부농들만 할수 있었으며 종전과 비교할수 없는 획기적인 능률을 보여준다.

기계화 된 콩 단일경작은 수십만 농민들이 어쩔수 없이 땅을 떠나게 만든다.

 

또 다른 문제로서 주변에 있던 잡초들이 기존의 제초제에 내성을 띠기 시작했다.

어쩔수 없이 농민들은 용량을 늘리거나 다른 제초제를 써야 했으며

이는 지속적으로 제초제를 팔아 먹을수 있는 거대 시장을 열어주게 된다.

실제로 이것은 녹색혁명이 아니라 한때 생산적이었던 소농 중심의 농업체제를

막강하고 부유한 극소수 대농장주들이 배하는 새로운 봉건적 농업제도로 후퇴시킨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의 메넴정부는 유전자조작 콩 종자가 들어올수 있도록 확실하게 문을 열어주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외채를 갚으려면 유전자조작 콩을 단일경작하는 방식으로 

농업생산방식을 변화시켜야 된다고 주장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밀어 붙인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농업을 록펠러 몬산토 카길 같은 

북미 투자자들의 볼모로 바꿔 놓는데 기여한다. 

국가채무는 오히려 더 크게 늘어 났으며 이를 불이행하면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더욱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거대 애그리비즈니스 기업과 외국투자자들의 후원을 받는 아르헨티나 지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농민들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더욱더 조직적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그들은 대부분 국가에서도 지원을 받고 있었다.

 

농촌사람들은 토지를 빼앗겼으며 자발적으로 떠나지 않으면 버티고 무장한 무리들이

들이닥쳐 소를 훔쳐가거나 작물을 불태워 그들을 위협했다.

농민 가족들은 대도시 외곽에 새롭게 형성된 판자촌으로 몰려 들었고

이곳에서는 사회혼란 범죄 자살이 횡행했으며 질병도 만연한다.

이러한 피해를 입은 소농의 규모가 무려 2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2004년이 되자 아르헨티나 전체 농경지 가운데 48%가 콩 작물에 사용 되었다.

이 중 90%이상이 몬산토의 라운드업레디였다

이와달리 낙농업 규모는 절반으로 줄어 들었는데 

이로인해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빈곤과 영양실조 수준은 더욱더 심화되었다.

728x90
반응형
LIST

'Global Capitalism' 카테고리의 다른 글

77. 생물무기의 확산  (0) 2024.07.29
76. 뉴욕외교협회  (0) 2024.07.28
74. 조류 인플루엔자  (0) 2024.07.26
73. 식량지배정책의 배경 및 폐해  (0) 2024.07.25
72. 유전자 조작 식물의 상업화  (0) 2024.07.24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