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에서 시작된 록펠러가의 녹색혁명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 직후 녹색혁명은 인도를 비롯한 다른 아시아 국가에도 추가로 도입된다.
이 전략의 골자는 수확량을 늘리는 현대농업기술을 도입하여 굶주림을 줄이고
가난한 나라들이 공산주의에 흡수당할 위험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실질적으로 식량생산을 세계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추후 일어나는 유전자혁명과 더불어 완결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록펠러재단과 포드재단을 비롯한 민간 면세재단들의 상당한 자금이 합세하는데
모두 미국정부와 밀월관계를 즐기는 재단들이었다.
경제자원까지 등에 업은 녹색혁명은 빠르게 발전한다.
녹색혁명은 곡물화학과 현대기술을 촉진한다는 포장 아래
미국의 애그리비즈니스를 핵심 개발도상국에 도입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 혁명이 오직 부유한 농토에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일부러 부농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부유한 지주와 가난한 소작농 사이의
빈부격차를 더욱더 벌려놓았다.
추가로 이들은 세계적인 국제농업연구자문그룹을 결성하는데
이 그룹은 1970년대 초 세계의 농업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들은 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유엔과 세계은행의 지원자금까지 끌어들인다.
연구지원금을 받은 이들은 선도적인 제3세계 농업과학자와 농업경제학자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현대적인 애그리비즈니스 생산개념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들이 이 개념을 자국에 고스란히 가져가 적용하도록 돕는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는데, 돌아간 그들이 자국에서
미국식 애그리비즈니스를 시행하는데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신중하게 짜인 네트워크는 훗날 록펠러 재단이 유전자조작 곡물을
전 세계에 확산시킬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들이 시행한 녹색혁명의 결과는 애초 약속한 것과 매우 달랐다.
새로운 화학 살충제를 마구잡이로 살포하면서 토양의 비옥도가 소실되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수확량도 감소하였으며 때로는 건강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기도 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무수한 양의 제초제와 살충제가 쓰이기 시작하였는데
이처럼 방대한 양의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사들일 돈이 없는 개발도상국가에서는
거액의 특별대출을 미국은행들로부터 받아야 했다.
이 같은 대출금들은 대부분 대지주들이 차지했으며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없던 소농들은 사채를 빌려 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채권자와 무역상들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으며 더러 땅을 잃기도 했다.
녹색혁명은 또한 개발도상국시장에 교잡종자를 널리 퍼뜨리는데
이것의 문제점은 재생산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교배종에는 번식을 막는 보호장치가 박혀 있었고
이로 인해 수확량이 2세대에 접어들면서 현저하게 떨어진다.
농민들은 수확량을 유지하기 위해 해마다 종자를 새로 사서 써야 했다.
소수의 거대 다국적 종자회사들이 이러한 교잡종자에 대한 특허권을 독점하면서
개발도상국에 팔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 것이다.
또한 이에 상응하는 화학물질, 석유, 농기계류 등 그 밖의 다른 농업 투입요소들을
추가로 팔아먹음으로써 더욱더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였다.
녹색혁명은 사실상 애그리비즈니스의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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