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에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의 수호자로 알려져 있던 오마르 토리호스라는 대통령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 될거라 믿을만큼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영향력 있는 미국의 최고경영자들을 포함하여 레이건대통령, 부시대통령,
와인버거 국방장관 및 합참본부장 등 수많은 주요인물들이 토리호스를 대놓고 싫어했다.
특히나 미국장교들이 싫어하였는데 토리호스와 카터의 협약으로 인해 파나마 운하 지역에 있는
미육군군사학교가 문을 닫게 된 계기가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이 시설들을 옮길 장소를 찾아야 했는데 받아줄 곳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토리호스를 제거하는 방안이 제시 되었다.
이 당시 파나마에 있던 대형 다국적 기업들도 토리호스의 적이었다.
그들은 대개 미국 정치인들과 결탁하고 있었고 남미의 노동력과 함께 천연자원을 착취하고 있었다.
백텔그룹은 그중 민간기업과 미국정부사이의 유착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이들은 파나마의 운하시스템을 새롭고 효율적인 것으로 바꾸기 위한 프로젝트에서
토리호스가 일본업체를 끌어 들였기 때문에 그를 미워했다.
이로 인해 운하의 소유권이 미국에서 파나마로 넘어 갔을 뿐 아니라
20세기의 가장 수입이 좋은 공사프로젝트에서 백텔이 제외 되었던 것이다.
결국 1981년 7월 31일, 오마르 토리호스는 파나마의 산 마르틴 근처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다.
이 사고는 공식적으로 기상 조건과 비행기 결함으로 인한 사고로 발표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사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미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쿠바라는 나라가 있다.
1902년 독립을 승인하기는 했지만 군대는 계속 주둔시키고 군부통치는 계속된다.
1926년 미국회사들은 쿠바 사탕수수의 60퍼센트를 차지한다.
전기와 전신 등도 대부분 미국계 독점 기업이 쿠바의 자회사를 지배하는 형식으로 차지했다.
1933년 군부통치는 일시적인 혁명으로 중단되지만 미국과 협력하는 바티스타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에 성공하고 공산화되었다.
외국기업의 설탕산업인수는 금지했으며 전기 및 전화회사에 대해서는 이윤이 과도하다고
요금인하를 요구했다.
미국은 이에 대해 경제제재로 맞섰으며 특히 설탕수출을 막았다.
1960년 카스트로는 대응책으로 쿠바전기회사를 비롯해 주요 기업에 대한 국유화를 선언한다.
미국은 무역봉쇄에 나섰고 쿠바는 나머지 기업도 국유화한다고 밝혔다.
미국은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쿠데타를 주도한다.
1961년 4월에 CIA가 훈련시킨 쿠바 난민으로 구성된 1400명의 특공대가
피그스만에 기습작전을 벌였지만 실패로 끝이났다.
114명이 현장에서 죽고 1000명이상이 포로가 된다.
추후 쿠바는 소련과 손을 잡는다.
1962년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진행된다.
소련을 겨냥한 미사일을 이탈리아와 터키에 배치한 것이 발단이었다.
쿠바와 협력하는것에 소극적이던 소련도 쿠바 미사일 배치에 동의했다.
양국은 결국 극적인 타협책을 찾았다.
미국의 요구대로 소련은 기존에 쿠바에 배치한 무기를 모두 철수시켰다.
반대급부로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전했다.
이후 CIA, 국무부와 펜타곤이 주도하는 카스트로 암살시도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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