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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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 1

Global Capitalism

by Paradise Guy 2024. 5. 14.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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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의 동진

공산주의가 붕괴된 후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브에게 

나토는 단 1인치도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뜨리면서

우크라이나는 영토 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 약속을 문서형태로 만들지 않았다.

구두 약속으로서 신사들 간의 신의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시는 재임 중 자신의 약속을 충실히 지킨다.

클린턴도 첫2년(1993~1994)동안은 전임자를 따랐다.

그러나 1994년부터 클린턴은 나토의 동진과 관련해 이중적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러시아에는 냉전 종식 당시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동유럽 국가를 나토에 가입시키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에 러시아 대통령 옐친이 클린턴에게 항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미국과 러시아는 두 나라에서 대선이 열리는 1996년까지

나토의 팽창을 연기하기로 합의 하였다.

그러나 클린턴은 다시금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나토 동진이 필요하므로 

나토확대에 간섭하지 말라는 입장을 옐친 대통령에게 분명히 말하기 시작한다.

 

추후 1997년에 체결한 나토-러시아 기본조약은 

지난 30년간 러시아가 펼친 외교정책 중 최대실책이라 평가 받는다.

기본조약은 나토의 팽창을 정당화한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서방 자본가들과 러시아 올리가르히의 

의도적인 러시아 약탈 행위 과정이라 알려지고 있다.

 

1999년에는 푸틴이 러시아 연방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되는데

집권초기부터 서방 세력과 밀착하며 러시아 국영자산을 빼돌리던

국내 올리가르히 세력을 대거숙청함으로써 

러시아는 다시금 단결할 수 있게 되었다.

오렌지 혁명

레오니드 쿠지마 대통령이 임기 만료에 따라 물러나게 되면서 치르게 된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는 쿠치마의 후보자 격인 여당 소속의 빅토르 야쿠노비치와

이에 맞서던 야당 후보 빅토르 유센코간의 맞대결 양상으로 흘러갔다.

선거 결과는 결국 아누코비치가 승리하게 되는데 반대자들은

이를 부정선거라고 규탄하면서 대규모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일어난 시위를 오렌지 혁명이라 부르는데 

돈바스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주에서는 이를 쿠데타라고 비난한다.

11월말에는 세베로도네츠크에서 대규모 야누코비치 지지대회를 조직하여 반격에 나섰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우크라이나 단방제는 실패했다고 규정하고 연방제 논의를 재점화했다

우크라이나를 연방국가로 조정하자는 이야기였다.

이 과정에서 하르코프 주지사의 발언이 흥미롭다.

그들은 키예프에서 400킬로미터 떨어져 있지만

러시아와는 40킬로미터 떨어져 있을 뿐이므로 

우크라이나 동부와 서부는 매우 다를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에게 생활방식을 강요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재선거가 실시되고 유센코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이 시기에 우크라이나는 파국적인 대결을 피하고 양쪽의 이익을 조정하기 위해

보여준 노력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유센코 집권 이후 다시금 공격적 우크라이나화 및 러시아와 거리두기 정책을

추진하였으니 위기는 해소되지 않고 지연된 상태였다.

이처럼 오렌지 혁명은 단지 정치적인 시위에만 그치지 않고 

친러 성향과 친서방 성향으로 극단적인 지역별 분쟁의 시초가 되었다.

이 후

그래도 당시는 호경기였기에 경제가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결국 대침체의 후폭풍으로 1인당 GDP가 3900달러에서 2500달러로 우크라이나 경제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후 IMF의 금융지원까지 받게 되었으나 우크라이나는 IMF가 요구하는 구조조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2010년2월 치러진 대선에서 야누코비치가 다시금 당선되었다.

그는 전 정부에서 추진하던 나토가입을 철회하였으며 야당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2010년 4월 흑해 주둔 러시아 해군의 철수도 취소하였으며 시한을 2017년에서 2042년으로 연장시켰다.

이는 훗날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무혈점령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어 버렸다.

 

돌이켜 보면 2004년을 기점으로 우크라이나 현대사의 마지막 평화기가 끝났다.

키예프는 2004년 세베로도네츠크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올바른 결론은 도출하는 데 실패했고

이렇게 우크라이나가 내부적으로 앓던 갈등은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유로마이단 혁명과 돈바스 전쟁,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촉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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