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비극은 과테말라에서 시작된다.
이 국가는 나치의 학살보다 더 오랫동안 학살 및 착취를 당했다고 알려진다.
미국 관광객들이 매우 좋아하는 아름다운 나라로 유명한 것과 달리
국민들의 삶은 매우 비참했다는 것이 진실이다.
모든 작물이 잘 자라는 기후에서도 배고픔과 영양실조로 인해
거의 절반의 가까운 어린이들이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죽는다.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주된 사망 원인은 위장염인데
항공기에서 살충제를 무차별적으로 살포한 것이 주원인이라고 한다.
농촌에는 위생시설이 존재하지 않으며 소수의 해당하는 수백 가구가 거의 모든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하루 20~50센트를 받으면서 욕실과 화장실을 가축들과 함께 쓰는
거의 수용소와 다름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이 국가의 비극을 언급하기에 앞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상으로 유나이티드 프루트라는 기업이 있었다.
1899년 설립된 회사로 바나나 독점을 통해 벌어 들인 수익으로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 등지에서 거대한 독점회사가 되었다.
1901년 과테말라 정부는 이 회사에 우편 서비스를 맡겼고 적도라디오전신회사가 설립된다.
1930년대 무렵 과테말라 토지의 40%는 이 회사의 소유였다.
바나나 공화국이란 말이 이때 생긴다.
본사도 미국 남부에 있다.
국무부장관이 되는 포스터 델레스가 이 회사를 법적으로 대표하는 기업의 동업자였고
회사 이사로도 이름을 올린다.
1931년부터 1944년까지 과테말라를 통치했던 인물은 호르헤 우비코다.
유럽의 파시즘을 동경했던 인물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과 협력하여 공군기지를 내주고
파나마 운하의 통제를 돕는다.
그가 통치하던 기간 중에 유나이티드 프루트 기업은 기존 농민을 쫓아 내고
그 자리에 방대한 규모의 농장을 만들었다.
국민은 저항했고 마침내 우비코는 축출된다.
헌법이 제정되고 1944년에는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가 열린다.
대통령 당선자는 철학교수 출신의 호세 아레발로 였다.
재임 기간 중 25번의 쿠데타가 시도되었지만 살아 남는다.
후임자는 대령 출신의 하코보 아르벤스구스만이다.
그는 공산당도 정치에 참여할수 있도록 하는 등 정치적 자유를 확대했으며,
지주들이 보유하고 있는 토지를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농지개혁을 추진한 인물이다.
유나이티드 프루트 기업이 확보하고 있었던 땅이 문제였다.
액면가로 보상해 주겠다고 했지만 회사 측은 거절한다.
대신 미국을 불러들였다.
쿠데타를 준비하는 한편 언론을 통해 아르벤스 정부에 대한 반공 프로파간다를 퍼뜨렸다.
작전명은 PBSUCCESS! 였다.
방식은 이란과 유사하다.
우선 반대 세력은 찾는다.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일련의 소요 사태를 준비한다.
군부 내에서도 협력 세력을 모은다.
해방군이 결성된다.
지도자는 아러벤스 정권의 농지개혁에 반대해 쿠데타를 시도한 카를로스 아르마스다.
1954년 6월 17일 400명의 정예요원이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시켰다.
정부가 통제하던 방송국은 전파 방해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전략적 요충지는 노련한 미국 공군조종사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쿠데타의 실페를 파악하기도 전에 아르벤스 정권 지지자들은 투쟁 의지를 잃었다.
그 해 10월에 치러진 선거에선 아르마스가 단독 후보로 나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기존에 시행하려던 농지개혁은 폐지된다.
추가로 반공국가위원회가 설립되고 공산주의 색출작업이 뒤 따랐다.
공략대상은 공산주의와 전혀 관련이 없는 노동조합화 소작농 협회 등이었고
인구의 10%가 공산주의 부역자로 분류된다.
정부의 탄압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은 남미의 빨치산이 되었다.
한 쪽에는 마야 원주민과 소작농이 있고 다른 쪽에는 반공을 내세우는 지주집단과 친미세력이
대결하는 구도였다.
1960년 11월 13일, 좌익성향의 젊은 장교들이 쿠데타를 시도한다.
미국과 협력하는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시발점이었다.
과테말라 군대로 위장한 CIA가 B26 폭격기로 반격했고 그들은 할수 없이 산악지대로 후퇴한다.
내전이 시작된다.
1962년 3월 수천 명의 시위자들이 부패 및 선거부정에 대한 저항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학생들에 의해서 시작됬는데 경찰과 군이 나서서 저항의 기세를 꺾었으나
일련의 폭력사태와 총파업이 발생한다.
과테말라는 물론 인근 국가의 유나이티드 프루트 기업의 사무실까지 공격을 당한다.
시민들과 대학생이 동조 시위에 나섰으며 이에 대응하는 정부의 혹독한 탄압이 시작된다.
1964년 대선을 앞두고 1958년 6년 임기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디고라스 장군은 여러 가지 일로
워싱턴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그는 아르벤스 이전의 개혁정부를 이끌었고 여전히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후안 호세 아레발로의 귀국을 허용함으로써 선거분위기를 조성한 뒤 1964년에 퇴임하려 했다.
그 당시 자유선거가 실시되면 아레발로가 권력에 복귀함 으로써 미국이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아르벤스와 같이 개혁과 독자적인 외교정책에 치중하는 정부가 탄생할 것으로 믿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1963년3월 이디고라스 대통령은 페랄타 대령이 주도하는 쿠데타에 의해 축출된다.
1963년 쿠데타는 미국의 사주와 지원에 의한 것이었다고 알려진다.
페랄타 정부의 성격은 그의 행정부 아래에서 8명의 정치 및 노조 지도자를 살해했는데
덤프트럭에 치여 죽게 한 것을 보면 잘알수 있다.
그는 3년동안 권좌에 있으면서 억압적이고 잔인한 정치를 펼친다.
게다가 페타랄타는 미국의 과테말라 개입에 대한 과도한 영향력에 분개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는데
결국 미국은 1966년3월 선거에서 민간인 훌리오 쎼사르 멘데스 몬테네그로라는 사람을 지지하고
멘데스는 선거에서 승리한다.
멘데스의 행정부는 잔인성에 있어서 페랄타 행정부를 훨씬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미국은 그를 제거하려는 쿠데타 시도를 막기 위해 적어도 두 번은 개입해야 했다.
그의 취임 후 며칠 내 미국의 웨버 대령이 새로운 과테말라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부임하고
반폭동훈련 규모를 확대하며 1966년 말이되자 게릴라 본거지에 대한 대공세를 개시한다.
국제사면위원회에 따르면 1966년10월부터 1968년 3월까지 약 3000~8000명의 과테말라인이
경찰 군 및 우익암살단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
1972년 무렵에는 이렇게 희생된 사람들의 수가 1만3000명으로 추정된다.
4년 후에는 죽거나 흔적도 없이 실종된 사람의 수가 2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들은 고문당하거나 팔다리가 잘리고 불태워져 매장 당하거나
플라스틱백에 넣인 채 호수나 강에 떠다니다 발견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일부 시체들은 비행기에서 태평양으로 내던져 버렸다고 전해진다.
구아린 지역에서는 아무도 더 이상 고기를 잡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너무나도 많은 시체들이 그물에 걸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과테말라 게릴라 전투에 사용하기 위해 미국이 개조한 F-51 전투기는
마을과 농작물 및 사람들에게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파나마로 돌아간다.
투하 현장에는 모든 것이 다 타버리고 살아 있는 생물을 구경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무차별 폭격지대라고 불리였으며 정찰기가 의심되는 게릴라 지역 상공을 비행한 뒤
특정 지역에 궁 격 요청을 받으면 제트기가 몇 분내로 도착해서 지상의 움직이는 모든 물체를 죽였다.
1968년 말 반게릴라운동은 거의 모든 게릴라 활동을 일소했으며 게릴라들은 저항능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1976년에 이르러서야 과테말라 빈민군이라는 중대한 게릴라운동이 일어난다.
1982년 3월 쿠데타가 발생하는데 거듭난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에프라인 리오스 모트 장군이 집권한다.
7월 1일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초기 6개월 동안 2600명의 인디오와 농민들이 학살 당했다고 한다.
그의 17개월 재임기간 동안 400개 이상의 마을이 처참하게 지도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1954년 아르벤스정부가 전복된 이래 과테말라 혁명은 30년 이상 지속됐으며
정부 측에 의해 살해된 사람의 수만 해도 6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미정부와 결탁한 과테말라 특권층에 의해 만들어진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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