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고 차베스가 출생한 해는 1954년이다.
재능이 많았던 인물로 운동, 문학, 연극 활동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베네수엘라에서 장교로 근무하던 당시 볼리바르주의에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
남미에 연방국가를 세우고자 한 사상이다.
크게 다섯 가지 정도로 요악될수 있는데
1. 남아메리카의 경제 및 정치적 주권 회복
2. 대중적 투표와 국민적 투포를 통한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
3. 자급자족
4. 국민에게 애국주의와 도덕 교육 실시
5. 광대한 천연자원의 공정한 분배 등이다.
차베스는 외세를 등에 업고 국민을 외면하는 정치 질서에 대해 남다른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결국 1992년 쿠데타를 시도한다.
인구의 60%가 절대빈곤 계층으로 떨어지고 정부와 기득권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던 시절이다.
차베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진해서 항복 했으며 구속된다.
대통령의 사면 조치로 풀려난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다.
볼리바르주의를 내세운 그의 진정성을 국민들은 높이 샀으며
결국 그는 1998년 12월 6일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차베스가 먼저 착수한 개혁은 정치적 기득권 허물기였으며 사법개혁도 이루어 냈다.
국회와 헌법이 검찰직을 통해 견제 받도록 하여 권력을 분산 시켰다.
빈곤퇴치, 교육기회 확대, 복시시스템 구축 등을 위한 조치도 바로 시작된다.
이에 대한 결과 그는 2000년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전보다 더 높은 지지를 받았다.
당연하게 부려 오던 것을 뺏긴 집단을 중심으로 저항이 뒤따랐다.
결정적인 발단이 된 사건은 2001년 11월 발표된 49개 항목의 임시법이다.
이 중에서도 3가지가 문제였다.
먼저 토지개혁 법안이 있었는데 경작을 하지 않고 놀리고 있는 지주의 자격을 박탈하고
경작 가능한 토지를 소규모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내용이다.
탄화수소 법안이 그 다음이다.
외국계가 독점하고 있는 석유산업에 대한 정부 통제를 확대함으로써 공공지출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한다는 목적이 있었다.
그간 외국계 기업이 독점했던 사업권은 앞으로 베네수엘라 정부와 합작을 할 때만 인정하기로 했다.
마지막은 어업 법이다.
해변 인근에서 대규모 선단의 어로 행위는 못하게 함으로써 영세 어민이 수자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한 조치다.
이러한 정부정책에 따라 차베스에 저항하는 집단이 단결하기 시작하였다.
군부, 언론, 상공인연합과 노동조합 등이 뭉쳤다.
가톨릭 교회도 반대 진영에 발을 담갔다.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세속적인 이해관계가 더 컸다.
교회로 할당되던 지원금이 빈민에게 전달되었고, 민주주의가 확산되면서 교회의 영향력이 줄었다.
무엇보다 국영 베네수엘라석유공사의 주요 간부가 정부 측 인사로 바뀐 일이 도화선이 되었다.
정리해고를 당한 간부들과 노조가 먼저 들고 일어섰다.
미국계 엑손모빌, 세브론, 코노코필립스를 비롯해 영국의 BP, 프랑스의 토탈, 노르웨이의 스타토일 등에 속한
노조도 파업에 들어갔다.
대규모 파업으로 경제난이 닥치기 시작하였는데 1973년 칠레 쿠데타와 매유 유사했다고 한다.
파업에 참가한 시위대가 누군가에 의해 피살 당하면서 정부 책임론이 불거졌다.
군부는 진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차베스를 체포하였지만 차베스가 내쫓겼다는 소식을 들은 민중들이
집결하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성난 군중이 거리로 몰려나와 쿠데타 세력을 몰아냈으며 차베스는 권력에 다시 복귀한다.
이후 차베스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국영 베네수엘라석유공사의 직원들을 친정부 인사로 채워버렸다.
정부정책에 협조하지 않았던 노조원들은 대규모로 해고된다.
2003년에는 분배정의, 복지확대, 빈곤퇴치와 교육 등을 포괄하는 볼리비안 과제가 도입된다.
외국자본에 대해서도 단호해졌다.
정부와 합작회사를 만들던지 아니면 철수하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한다.
미국 기업들은 이를 거부했지만 다른 외국계는 이러한 조건에 타협하는 옵션을 택한다.
58살의 나리에 갑작스레 죽기 전까지 그가 일군 성과는 눈부셨다.
직접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렸고, 150만 명 이상이 문맹에서 벗어났으며 초등학교에 등록한 학생수도
2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빈곤율 또한 42.8%에서 26.5%로 낮아졌으며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도 상당히 개선됬다고 한다.
차베스의 실험은 남미 다른 국가들로 자연스럽게 퍼져 나갔다.
기득권을 무너뜨리고 복지를 늘리는 데 필요한 재원은 국유화를 통해 얻는 전략도 확산되었다.
빈민을 위한 재분배 정책도 모방 대상이었다.
차베스형 좌파 정권은 볼리비아, 에콰도르, 니카라과, 온두라스 등에 잇따라 들어섰다.
남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24시간 뉴스채널 텔레수르도 출범한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과 경쟁하기 위한 남반구 은행 역시 2007년에 발표된다.
모두 차베스가 주도한 작업이었다.
대외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미국의 복합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장 국유화 조치가 각나라마다 시행되기 시작하면 석유, 전기, 석탄과 금광 등에 진출한 자국 기업이
막대한 손해를 본다.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유전에서 배제되는 것은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미국이 오랫동안 관리해 오던 남미에 좌파 성향의 정부가 들어서고 장기적으로 남미 공동체가
들어선다는 것 역시 용납하기 힘들었다.
터키와 협력해서 달러 대신 금을 국제통화로 활용하겠다는 계획 또한 위협이 되고 있었다.
미국은 필사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키려 했다.
반정부 시위를 위한 재정지원이 빠질 수 없다.
미국 정부는 2015년 한 해에만 대략 426만 달러의 돈을 반정부 세력에게 지원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 200만 달러는 적대국 내부에서 민주화 운동을 촉진함으로써 친미 정권이 수립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증거는 없지만 암살이 시도되었다는 정황도 많다.
믿거나 말거나 한 소문 중 하나가 남미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암 음모론이다.
차베스는 이에 대한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 등이
잇따라 암 진단을 받은 직후였다.
참고로 미국은 1940년대 과테말라인 2000명을 대상으로 매독균 등을 실험한 사례가 있다.
냉전 이후 CIA가 주도했던 MK울트라와 같은 작전도 참조해 볼 필요가 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겨냥한 독살 음모 또한 잘 알려져 있다.
어쨌든 차베스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곧이어 미국에 우호적인 상황이 이어진다.
2009년 발족한 남반구 은행은 구심점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었으며 좌파 정권으로 물갈이 된
남미상황도 급변하기 시작한다.
2014년까지만 해도 우파 정권은 파라과이가 유일했지만 2018년이 되자 콜롬비아, 브라질,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등이 모두 우파 정권으로 채워진다.
게다가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니콜라스 마두로가 이끄는 배네수엘라 상황은 최악이다.
의약품과 식료품을 공급하지 못해 탈출하는 국민이 무려 수십만에서 수백만명에 이른다는 소식이다.
인플레이션은 1,000,000%를 넘어섰으며, 주요 수입원인 석유 수출량도 역대 최저수준으로 떨어진다.
2018년 5월 마두로가 연임에 성공한 이후 미국발 경제제재는 더욱더 강화되었다.
미국 내에 있는 베네수엘라 자산을 동결하고 원유 수입을 금지한 것은 그 직후다.
베네수엘라와 거래하는 다른 국가와 기업에 대해서도 처벌하겠다고 경고했다.
2018년 8월에는 마두로 대통령의 연걸식장에 드론 공격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미국과 콜롬비아가 배후로 지목되었다.
참고로 마두로는 차베스의 분신과 같은 인물이다.
그는 1994년부터 차베스의 정치적 동지였지만 안타깝게도 차베스를 대신할 만큼의 카리스마는 없었다.
미국이라는 강력한 외부 세력과 맞서면서 이를 해결할만한 리더쉽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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