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전반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기다긴 냉전 종식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해
앞으로 시대는 전쟁이 없는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가 생겨나고 있었다.
부시 행정부는 막대한 국방예산을 삭감하고 평화분담 프로그램을 실시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6월에는 의회가 지난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가장 중요한 국방예산을 감축할 태세를 갖추자
의회와 국방부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조지부시 대통령은 국민과 의회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확신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 당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해 버리는 국제분쟁이 벌어졌는데
이는 1980~1988년 이라크와 이란 양국 간의 잔혹한 전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라크는 자신들이 이란과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쿠웨이트가 국경선 부근에서 24억달러에 해당하는 원유를 훔쳐 갔다고 주장한다.
또한 쿠웨이트가 이라크 영토에 군사 및 기타 시설들을 구축했고
나아가 석유수출기구의 할당량을 초과생산하여 원유의 가격을 떨어뜨려 자국경제를 위협했다고 선언했다.
1990년 7월 말, 쿠웨이트가 피해보상 청구요청을 거부하고 석유생산 할당량 준수를 무시하자
이라크는 대규모 군대를 쿠웨이트 국경선에 배치하기 시작한다.
7월 19일 미국방장관은 딕체니는 쿠웨이트가 공격을 받게 된다면
미국이 방어해줄 것이라는 약속이 유효하다고 공표한다.
반대로 7월24일 국무부 대변인 마거릿 텃웨일러는 쿠웨이트와 어떤 방위조약도 맺은 바가 없다며
어떠한 안보 의무가 없다고 주장한다.
7월27일 하원과 상원은 이라크의 인권침해를 이유로 이라크에 대해 경제제재조치를 취하기로 결의했다.
반대로 부시 행정부는 이 조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차 표명한다.
7월 31일 국무부 차관보 존 켈리는 페르시아만의 어떤 국가와도 방위조약을 체결한 바 없다고 주장한다.
다음날 이라크 군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쿠웨이트 국경을 넘자마자
미국은 앞서 주장했던 전쟁개입에 대한 공식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반대의사를 다시 표명한다.
이라크는 이도저도 아닌 애매모호한 미국의 입장 표명을 쿠웨이트를 침공해도 된다는 메시지로 해석하였다.
심지어 이라크 공격 일주일 전 정보전문가들은 쿠웨이트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부시 행정부에게 전했지만
정부는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CIA국장 또한 부시에게 같은 내용을 보고 했다고 한다.
CIA국가경보 정보요원이 중동반 사무실에 들어와 마지막 경고라고
24시간 안에 쿠웨이트를 침공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든 경고가 외관상 무시당하고 있었을 때 미 국방부는 오히려 지휘소훈련을 부지런히 하고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전쟁 계획이라는 명목 하에 공군기지에서는 이라크 내 폭격 목표물을 찾아내기 위한
시뮬레이션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1990년 봄, 미 회사가 이라크에서 석유화학프로젝트를 철수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상 사담 후세인은 미국의 중립표명을 쿠웨이트를 침공해도 좋다는
부시 행정부의 신호로 받아 들이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1990년2월 사담후세인은 한 아랍정상회담에서 이러한 음모를 미국이 부추기거나 충돌질 했다는
관련근거로서 페르시아만 해역에 미군이 계속해서 주둔하고 있는 것을 비난한다.
또한 사담후세인이 쿠웨이트에게 서로 인정할 수 있는 국경선 설정에 대해 협의하자고 제안한 후
5월에 있었던 아랍정상회담에서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견해차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미국이 망쳐 놓았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쿠웨이트가 어떤 타협도 하지 못하도록 부채질했다는 것이다.
쿠웨이트는 협상 대신에 미국의 군사력에 의존할수 있게 된다.
결론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미국이 유도 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이라크군이 국경을 넘은 지 몇시간안에 미국은 전시체제를 갖추기 시작했고
백악관은 이라크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가능한 모든 조치를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하며
조지 부시는 미 방위력을 서서히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한다.
동유럽과 소련의 정치적 변화로 방위산업이 상당한 축소 외협에 놓인 지 1년도 안되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군수산업에 희망이 되었다.
심지어 전국방부 차관보 로렌스 코브에 따르면 '사담 후세인에 대한 전투보다는
다가오는 국회에서의 예산 싸움 때문에 추진되는 것 같다'고 진술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로 인해 국방비 예산삭감을 지지했던 옹호자들이 생각을 바꾸게 되고
국방비 예산은 대부분 유지되는 방향으로 커다란 변화가 발생한다.
또한 조지부시의 지지율은 74%로 뛰어오른다.
미국은 가혹한 경제제재를 가하기 시작하며 유엔을 통해 전쟁허가를 얻어낸다.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점령했지만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미국과의 협상에 다시 나선다.
사담후세인은 루마일라 유전 독점권, 페르시아만 접근보장, 제재조치 해제, 원유생산 및
가격문제 해결을 조건으로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서 철수하겠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부시 행정부는 이러한 이라크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묵살해 버린다.
국무부는 이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 조차 무조건적으로 부인했으며
반드시 군사적 목표에 도달한 후 평화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산을 보장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고 한다.
11월 29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만약 이라크가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이라크를 쿠웨이트에서 몰아내기 위한 모든 필요한 수단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그리고 15일 직후 사담은 이라크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보장한다면
쿠웨이트에서 철수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전쟁에 대비해서 50만이나 되는 병력을 사우디아라비아에 배치해 놓은 미국으로서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장기간의 전쟁 준비기간과 전쟁 시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부시가 왜 페르시아 만의 전쟁에 개입했는지 왜 미국을 전쟁에 휘말리게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의원 저널리스트 편집자 및 평범한 시민들은 대통령에 무슨 이유로 전쟁에 참여했는지
설명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매주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1990년 8월 이라크 침략 이후 1991년 2월 21일이 돼서야 모든 군사행동이 중단되고
이라크는 완전철수협정에 동의하게 된다.
다른제재조치는 지속되더라도 이라크에 대한 군사적 공격은 일어나지 말아야 정상이겠지만
조지부시는 휴전제의를 거부한다.
24시간 안에 쿠웨이트에게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빠듯한 시간을 부여하고 기한이 지나자마자
이를 빌미로 장기적인 지상전을 개시하였으며 도로상의 대학살을 포함해 공군 폭격도 그달 말까지 계속된다.
군사 전쟁이 끝나고 경제적 제재조치는 1994년까지도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라크에서 총 40만 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한다.
*Comment: 전쟁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동시다발적으로 있을 수 있음. 위의 쓴 글에서는 이라크를 대상으로 한 공격질의 주원인이 예산 승인이라는 주제에 맞춰져 있는데 실질적으로 오일 전쟁이었다는 또 다른 이유도 존재함. 이라크는 그 당시 숨겨진 오일 규모에서 세계 최대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영미 정보기관들의 추정이 파다한 상황이었음. 1980~1988년까지 벌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을 통해 이라크는 빚더미에 앉아 있었고 그 당시 사담 후세인은 부채를 빌미로 오일 자산을 다국적기업들에게 헐 값에 팔아 넘기라는 미국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고 함.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함. 우선 사담 후세인이 어떻게 이라크 대통령이 되었는지 그 배경을 알 필요가 있는데 그는 CIA가 직접 훈련시킨 인적자산이며 당시 이라크 정부에 친미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활용됬던 인물임. 그랬던 그가 대통령이 되고 이란-이라크 전쟁이 종결된 후 자국 자산을 지켜야 된다며 미국의 입장에 반하는 국정운영을 하기 시작함. 뭣 보다 중요한 건 그가 러시아, 중국, 프랑스와 석유 채굴권 계약을 체결하는 반면 미국 및 영국 관할하에 있는 오일 회사들은 차단해 버림. 결국 2003년 미국은 이라크가 핵무기를 비밀리에 개발하고 있으며 대량 살상 무기를 숨기고 있다는 명목으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고 사담 후세인은 여러 혐의로 기소되어 2006년 교수형 당하게 됨.
54. 리비아(1981~2011) (0) | 2024.07.06 |
---|---|
53. 아프가니스탄(1979~1992) (0) | 2024.07.05 |
51. 이라크(1972~1975) (0) | 2024.07.03 |
50. 파나마(1969~1991) (0) | 2024.07.02 |
49. 인도네시아(1965) (0) | 2024.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