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10월 하급군 장교로 구성된 소규모 병력이 6명의 장성을 납치해서 살해하고
자카르타 시내 주요 지점들을 장악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추후 이들은 방송에 출연해서 자신들의 이러한 행동이 10월 5일 국군의 날 군 장성회의 멤버들 주도하에
예정되어 있었던 반란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발표한다.
그러나 이 하급장교들의 반란은 이날 뒤 늦게 수하르트 장군의 주도하에 군에 의해 진압되어 버린다.
CIA가 지원하는 이 역쿠데타는 수카르노 대통령을 축출하기 위한 활동이었다고 알려진다.
수하르트는 역쿠데타의 성공이 후 하급장교들의 쿠데타 시도 배후에 다수의 PKI당원들이 있으며
이 당원들의 배후에는 중국이 있다고 비난한다.
승리에 도취한 군은 정권을 강탈 했고 수카르노의 권한을 제한했으며
PKI당원들을 제거하기 위해 대량학살을 저지른다.
정말 '군 장성회의'가 며칠 내에 권력을 탈취 하려고 했었는가를 따져보자면
이러한 회의는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CIA입장에서 작성되고 출판된 한 연구서에 따르면 '군 장성회의'가 존재하긴 했으나
이 회의의 진정한 목적은 군을 제압하려는 수카르노 대통령으로부터 군을 보호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쿠데타는 수카르토 대통령이나 인도네시아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군 지도부의 숙청이 본질적인 목적이었다고 밝힌다.
CIA가 개입 했다면 그들의 주목적은 무엇이었을까?
CIA가 책을 출판하는 특이한 짓을 왜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쿠데타 시도에 대한 책임을 PKI에게 전가시켜 PKI 소탕을 유도됐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제3세계에서 수카르노를 제거하고자 하는 미 정부의 바람은
1958년 CIA가 지원한 군 반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수그러들지 않고 있었다.
1962년 6월 기록된 케네디 대통령과 영국 수상사이데 벌어진 회담 가운데
두 지도자는 기회를 틈타 수카르노를 제거하자고 합의 했다고 한다.
어쨌든 국제적으로 성가신 존재였던 수카르노는 제거되었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가장 큰 공산당 중 하나였던 PKI당원들 상당수 제거 되었다는 사실이다.
1965년 10월 공산주의 반란 시도와 군부의 역쿠데타 당시 고급 장교들을 포함한 1200명 이상의
인도네시아 군 장교들은 이미 미국에서 군사교육 및 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이 당시 만들어진 인적네트워크를 통해 인도네시아와 미국의 군부는 양국 육군 사이에
수 많은 친선과 접촉 사례가 형성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은 기존의 교류채널을 이용해서 반공주의 세력들에게 군사물자를 계속해서 지원할 수 있게 된다.
1965년 인도네시아는 사실상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워싱턴은 인도네시아가 공산화되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었지만 8월 연설에서 수카르노가
인도네시아에 1년 이내에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설 것이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워싱턴은 이러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며 식량과 군수품이 부족했던 수하르토 장군의 부대에게
제3국을 통한 미국의 지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제공한 비밀원조가 없었더라면 그의 역쿠데타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교 수석연구원 네빌 맥스웰은 그가 입수한 외무부 문건에서 유럽 주재 파키스탄 대사가
당시 외무장관 부토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을 접했는데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서방정보기관들은 실패할 운명의 때 이른 공산주의 쿠데타를 조작함으로써
군에게 공산주의자들을 진압할 합법적인 기회를 제공한 것이며
수카르노를 군의 포로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수하르토 장군의 집권 이후 그는 거의 30년 동안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새 질서에 대해 강요하였는데
국가를 1930년대의 시카고 갱단 수준으로 다스렸다고 한다.
감옥은 정치범 들로 넘쳐나고 고문은 일상적이었다.
1975년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침략하는데 이곳은 포르투갈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독립을 선언한 지역이다.
침략을 계기로 1990년대까지 이어지는 대학살이 시작된다.
전체인구의 60~70만 명의 인구 중에서 20만의 사람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5년 12월의 이 침략은 미국의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수하르트 대통령과 회담을 마친 후 인도네시아를 떠난 지 하루 만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1970~1980년대 미 국무부 관리들은 언론 발표와 의회 증언에서 UN 및 유럽국가들과는 달리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영유권을 일관성 있게 지지해 왔으며
침략과정에서 깜짝 놀랄 만큼 대학살을 가볍게 평가한다.
한편 인도네시아 어디에나 찾아볼 수 있는 미국식 군사고문 훈련 무기 및 기타 모든 장비들이
인도네시아군의 수중으로 계속 흘러오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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