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가 후원하는 개혁(예고르 가이다르 총리 재임)은 1992년 후반,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의회와 중앙은행에서 반대가 커졌습니다.
만약 IMF가 제안하는 재정적자 목표를 시행한다면 최대 40%의 산업 공장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기 됬기 때문입니다.
중앙은행 총재인 게라셴코 씨는 시민연합당의 아르카디 볼스키의 지원을 받아
(IMF의 조언에 반하여) 국유기업에 대한 신용을 확대하고 동시에 건강, 교육, 노령연금 지출을
대폭 삭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시민연합은 1992년 9월에 "대안 프로그램"을 내놓았습니다.
1992년 12월 의회 위기로 총리가 예고르 가이다르로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연합의 프로그램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IMF는 1992년 후반, 가이다르가 해임되기 전, 중도파 시민 연합이 제안했던
접근 방식에 동의했습니다.
모스크바에 있는 IMF 상주 대표의 말에 따르면 "IMF는 가이다르와 비슷한 경제적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후임자와 협력할 것입니다."
1993년 초, 정부와 의회는 공개적인 대립관계로 발전했습니다.
정부의 예산 및 통화 정책에 대한 입법 통제는 IMF 프로그램의 "원활한 실행"을 훼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의회는 국영 산업의 민영화를 늦추고, 외국 은행에 제한을 가하고, IMF가 요구하는 대로 보조금과
사회 지출을 삭감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을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개혁에 대한 반대는 주로 온건 중도파(옐친의 전 협력자 포함)의 지배 정치 엘리트 내부에서 나왔습니다.
의회 내 소수파를 대표하는 시민 연합(아르카디 볼스키가 이끄는 산업가 연합도 포함)은 중앙 국가의
강력한 역할을 유지하면서 국가 자본주의의 발전을 지지했습니다.
따라서 옐친과 의회의 대립에서 주요 정치 행위자들(예: 알렉산더 루츠코이, 루슬란 카스불라토프)은
"공산주의 강경파"로 분류될 수 없었습니다.
정부는 입법부를 완전히 우회할 수 없었기에 양원은 1993년 9월 21일 대통령령에 의해 정지당했습니다.
9월 23일, 이틀 후, IMF 관리 이사인 미셸 캉드쉬 씨는 IMF의 체계적 변환 시설(STF)에 따른
30억 달러 규모의 대출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암시했습니다.
그 이유는 "러시아가 주로 의회의 침해로 인해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STF 대출은 부채가 있는 제3세계 국가와 협상된 구조 조정 대출과 형태가 비슷합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4월 밴쿠버 정상회담에서 서방의 "원조"가 "민주적 개혁"의 실행과
연계되어 있다고 언급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IMF와 서방 채권국이 정한 조건은 의회를 완전히 정지시키는 것으로만 충족될 수 있었습니다.
정예 부대와 박격포가 러시아 연방 정부 청사를 습격한 것은 모스크바와 그 지역 내부의 정치적 반대를
무력화시키고 IMF식 개혁에 반대하는 개인을 없애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G7은 양원을 폐지하려는 옐친 대통령의 법령을 지지했으며 모스크바에 있던 대사관은
사전에 브리핑을 받았습니다.
9월 21일 대통령 법령에 이어 경제 개혁의 속도를 높이고 5월 러시아 정부가 서명한 IMF 대출 계약에
포함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일련의 법령이 즉시 뒤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신용은 즉시 긴축되었고 이자율은 인상되었으며, 사유화와 무역 자유화의 속도를 높이기 위한 조치가
채택되었습니다.
의회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된 재무부 장관 Boris Fyodorov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원하는 정부예산을 무엇이든 넣을 수 있게 됬다고 합니다.
옐친 대통령의 포고령 타이밍은 적절하게 선택되었습니다.
옐친의 재무 장관인 보리스 표도로프는 9월 25일, G7 재무 장관 회의에 보고할 예정이었고,
외무 장관인 안드레이 코시레프는 워싱턴에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날 예정이었고,
IMF-세계은행 연차총회는 9월 28일에 워싱턴에서 시작될 예정이었으며,
10월 8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런던 상업은행 채권자 클럽(도이체은행 의장) 회의가 열리기 전인
10월 1일은 IMF의 대기 대출에 대한 결정의 마감일로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10월 12일, 옐친 대통령은 일본으로 가서 부채 구제와 일본의 원조를 조건으로
4개의 쿠릴 열도 운명에 대한 협상을 시작할 예정이었습니다.
의회 정지에 따라 G7은 "최근의 발전이 러시아가 시장 개혁의 길에서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매우 강력히 바란다"고 표명했습니다.
독일 재무부 장관인 테오 바겔은 "러시아 지도자들은 경제 개혁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국제 재정 지원을 잃게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셸 캉드쉬는 러시아의 정치적 발전이 "경제 개혁 과정을 가속화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고 표명했습니다.
이러한 서방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IMF는 아직 러시아에 "녹색불"을 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중앙은행의 친시민연합 총재인 빅토르 게라슈첸코 씨는 여전히 통화 정책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1993년 9월 말(의회 반란이 한창일 때) 모스크바로 파견된 IMF 사절단은 미셸 캉드쉬에게
정부가 보조금 삭감과 신용 통제를 위해 발표한 계획은 불충분하다고 조언했습니다.
1993년 9월 경제령의 영향은 즉각적이었습니다.
에너지 가격을 더욱더 자유화하고 이자율을 인상하기로 한 러시아의 결정은 그들의 산업을 더욱더 빠른
파산의 절차를 겪게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1993년 10월 중순, 국영 빵 유통 회사인 Roskhlebprodukt의 규제 해제로 빵 가격이
하룻밤 사이에 3~4배나 올랐습니다.
러시아 국민의 이 "두 번째 빈곤의 물결"은 1992년 실질 구매력이 약 86% 감소한 이후에 발생했다는 점을
강조할 가치가 있습니다.
모든 보조금이 국가 예산에서 조달되었기 때문에 절약된 돈은 (IMF의 지시에 따라)
러시아의 외채 상환에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1993년 9월 쿠데타 이후 재무부 장관 보리스 표도로프가 제안한 재정 시스템 개혁은 부채가 있는
제3세계 국가에 부과된 세계은행 공식을 따랐습니다.
이는 모스크바에서 지역으로의 수입 흐름을 차단하고 중앙 정부의 재정 자원을 채권자에게 상환하는 데
전환함으로써 공화국과 지방 정부에 "재정적 자율성"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개혁의 결과는 재정 붕괴, 경제적, 정치적 발칸화, 러시아 지역 경제에 대한
서방과 일본 자본의 강화된 통제로 연결되었습니다.
1993년까지 개혁으로 인해 러시아의 부가 엄청나게 약탈당했고,
그 결과 상당량의 실물 자원이 유출되었습니다.
1993년 지불수지 적자는 40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1993년 도쿄 정상회담에서
G7이 약속한 원조(430억 달러) 금액과 거의 같습니다.
이 서방의 "원조" 또한 대부분 허구였습니다.
원조는 주로 대출 형태(무상원조가 아님)였으며, 러시아의 외채(1993년 기준 800억 달러)를 늘리고
러시아 경제에 대한 서방 채권자의 영향력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악영향을 초래했습니다.
러시아는 채권자들에 의해 제3세계 국가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다루어졌습니다.
1993년, 약속된 총 434억 미국 달러 중 실제로 지출된 것은 30억 달러 미만이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의 공식 부채 재조정과 관련하여 파리 클럽과 체결한 협정은 언뜻 보기에 관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스크바에 매우 짧게 숨 쉴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습니다.
소련 시대에 발생한 부채만 재조정될 예정이었습니다.
옐친 정부가 부담한 막대한 부채(아이러니하게도 주로 경제 개혁의 결과)는 협상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양자 공약과 관련하여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밴쿠버 정상회담에서 16억 미국 달러라는 빈약한 금액을
제안했습니다.
9억 7천만 달러는 주로 미국 농장주로부터의 식량 구매를 위한 신용 형태였습니다.
6억 3천만 달러는 미국 농무부의 "식량 진보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자금을 조달할 미국 곡물에 대한
러시아의 미지급금이었습니다.
이로써 러시아는 PL 480에 따라 미국 식량 지원을 받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와
동일한 입장에 서게 됬습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지원은 대부분 러시아에 투자하는 "일본 기업에 대한 보험"에
할당된 자금이었습니다.
1993년 9월 의회의 반대가 제거되자 모스크바의 상업 은행과의 부채 협상 전략이 즉각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타이밍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1993년 10월 초 백악관 습격 이후 불과 4일 만에 열린 런던 클럽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러시아 협상팀은 러시아의 상업 부채에 대한 "탕감"이나 "상각"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제안된 거래에 따라 정산 날짜는 일시적으로 연기됩니다.
380억 달러의 상업 부채 중 24억달러는 재조정됬습니다.
런던 클럽의 모든 조건은 모스크바 협상팀이 수락했지만 "법적 조치에 대한 주권 면책"을
포기한다는 조항은 제외했습니다.
이 포기는 채권 은행이 부채 상환 의무가 충족되지 않을 경우 러시아의 국영 기업을 압류하고
물리적 자산을 몰수 가능하게 만드는 조항이었습니다.
상업 은행에 있어서 이 조항은 결코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 경제의 붕괴, 지불수지 위기, 파리클럽에 따른 채무 상환 의무의 누적으로 인해 러시아는
"기술적 유예", 즉 사실상의 채무 불이행 상황으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외국 채권자들은 또한 러시아의 외환 보유액(중앙은행과 러시아 상업은행의 달러 예금)을
채무 상환으로 전환하는 메커니즘을 고려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러시아인들이 해외 은행 계좌에 보유한 외환 보유액에도 주목했습니다.
IMF의 경제적 치료법은 부채 상환 의무를 강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라
부채를 늘린다는 의도 또한 있었습니다.
개혁은 국가 경제를 마비시켜 외부 신용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결국 부채 불이행은 모스크바와 채권자 간의 관계에서 새롭게 나아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러시아 국가는 부채와 구조 조정의 굴레에 갇혔습니다.
국가 지출은 채권자에게 상환하기 위한 국가 기금을 풀어주기 위해 삭감되었습니다.
위기가 심화되면서 인구는 점점 고립되고 취약해졌습니다.
"민주주의"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지만 대중과 분리된 새로운 정당은 대체로
상인과 관료의 이익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민영화 프로그램은 고용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93년까지 50%가 넘는 산업 공장이 파산했습니다.
게다가 군수 산업 단지에 속하고 국가 신용과 조달에 의존하던 우랄과 시베리아의 전체 도시가
폐쇄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1994년(공식 수치에 따르면) 국영 산업 기업과 집단 농장을 포함한 약 33,000개의 부채 기업의 근로자들은
정기적으로 임금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지속적인 빈곤과 대량 실업으로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사회구조는 훨씬 더 깊이 파괴되고 있었으며, 여기에는 기관의 파괴와 러시아 연방의
잠재적인 해체가 포함됩니다.
G7 정책 입안자들은 세계 평화를 위해 그들이 벌인 행동의 결과들을 신중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세계 지정학적 및 안보적 리스크는 광범위합니다.
IMF 경제 패키지의 지속적인 채택은 3세계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재앙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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